“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옳소이다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제게 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는 ‘다랑이’입니다.
‘다랑’은 多+Love입니다.
많이 사랑스러운 고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이유보다 더 많이 사랑스러운 고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실까?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측은하게 여겨 주실까?
나는 오히려 다랑이보다도 더 부족하고 형편없는 주님의 고양이인 것 같은데….
자격으로 따지면 나는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없는 이방인.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세인이요,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는 사두개인일 뿐입니다.
지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제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나이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우리 다랑이를 사랑하며 하는 말,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 걱정거리가 없어. 그러니 그냥 행복하게 건강하게 우리와 오래 살면 돼!”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와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품에 안으시고, 자녀 삼아 주신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염려하리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죄인은 주님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주목하여 주소서!”
새벽 시간인데 다랑이가 “미야~”하고 부릅니다.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 갑니다.
다랑이처럼 주님을 향해 웁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시고 인도하신 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내가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이므로 나는 그저 주인님께 “미야~”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편안하게 졸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단지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ChatGPT 버전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옳은 고백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제게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제게는 더 마음에 와닿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의 이름은 ‘다랑이’입니다.
‘다랑’은 多 + Love,
사랑을 많이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많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랑받을 이유가 많아서가 아니라,
이유를 따지기 전에 이미 사랑스러운 고양이.
그래서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바라보고 계실까?
주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측은히 여기고 계실까?
나는 다랑이보다도 더 부족하고 형편없는,
주님의 고양이조차 되지 못할 존재 같은데….
자격으로 따지자면
나는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없는 이방인,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세인이며
입술로만 믿음을 말하는 사두개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리고 제 마음으로 다시 고백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다랑이를 품에 안고 말합니다.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그저 행복하고 건강하게, 우리와 오래 살면 된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저를 품에 안으시고 자녀 삼아 주신다면,
제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제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죄인은 주님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를 한 번만 주목하여 주옵소서.”
새벽녘, 다랑이가 “미야~” 하고 저를 부릅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다랑이처럼,
주님을 향해 웁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시며 인도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내가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라면,
나는 그저 주인님을 향해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평안히 졸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단지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Copilot 버전
“주는 나의 선한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옳은 말씀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다소 거리감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더 확실한 비유가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은 ‘다랑이’입니다. ‘다랑’은 多와 Love의 합성어, 곧 ‘많이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입니다. 사랑받을 이유보다 더 많이 사랑스러운 고양이이기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그래서 자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실까?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측은히 여겨 주실까? 나는 오히려 다랑이보다 더 부족하고 형편없는 주님의 고양이 같은데….
자격으로 따지면 나는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없는 이방인,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세인이며,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는 사두개인일 뿐입니다.
지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제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나이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다랑이를 사랑하며 늘 하는 말,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 행복하게, 건강하게, 오래 우리와 함께 살아주렴.”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품에 안으시고 자녀 삼아 주신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죄인은 주님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주목하여 주소서!”
새벽, 다랑이가 “미야~” 하고 부릅니다.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다랑이처럼 주님을 향해 웁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시고 인도하신 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나는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이므로, 그저 주인님께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편안히 졸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단지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Gemini 버전
“주는 나의 선한 목자요, 나는 그의 어린 양이라.” 옳은 말씀입니다만,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제게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대신 제게는 더 선명하고 확실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으신 주인이며, 나는 그의 고양이입니다.”
저희 집에는 ‘다랑이’라는 고양이가 삽니다. ‘다랑(多+Love)’은 이름 그대로 넘치는 사랑을 받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사랑받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기에 저는 다랑이를 아낍니다.
그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자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주님께서도 나를 이토록 가련히 여겨 주실까?’ 돌이켜보면 저는 다랑이보다도 부족하고 형편없는 고양이인 것만 같습니다.
자격으로 따지자면 저는 주님의 성소에 거할 수 없는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이기심과 교만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이요, 입술로만 믿음을 뇌조리는 사두개인일 뿐입니다. 이제 떨리는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백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태복음 15:27)
그 말씀에 기대어 저 또한 고백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고 사나이다!”
부족한 주인인 저조차 다랑이를 품에 안고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주렴.”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걱정하고 염려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나의 기도는 오직 하나로 수렴됩니다. “이 죄인을 주님의 고양이로 받아 주소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의 눈동자에 담아 주소서!”
깊은 새벽, 다랑이가 “미야~” 하고 저를 부릅니다.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 다가가며, 저 또한 주님을 향해 울어 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곁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한 채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주는 나의 좋으신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내가 그분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라면, 그저 주인님을 향해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따스한 햇볕을 쬐며 편안히 조는 것, 그것이 제 삶의 전부여도 충분합니다.
나는 단지,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perplexity 버전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옳은 말씀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표현은 다소 멀게 느껴집니다.
저에겐 조금 더 확실한 비유가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의 이름은 ‘다랑이’입니다.
‘다랑’은 多 + Love,
많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랑받을 이유보다 더 많이 사랑스러운 고양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 생각합니다.
주님도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실까?
나를 이렇게 측은히 여기실까?
나는 오히려 다랑이보다도 훨씬 부족하고 형편없는 주님의 고양이 같은데….
자격으로 따지자면, 나는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없는 이방인.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새인이요,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는 사두개일 뿐입니다.
지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나이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다랑이를 사랑하며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
그냥 행복하게, 건강하게, 우리와 오래오래 함께 있으면 돼.”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나를 품에 안으시고 자녀 삼아 주신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기도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죄인은 주님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주목하여 주소서.”
새벽 시간, 다랑이가 “미야~” 하고 부릅니다.
나는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 갑니다.
그리고 다랑이처럼 주님께 울부짖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셨으나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내가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이기에,
그저 주님께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편안히 졸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단지,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Grok 버전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저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집니다.
대신 제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는 ‘다랑이’입니다. ‘다랑’은 多 + Love, 많이 사랑스러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이유보다 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문득 자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실까? 이렇게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봐 주실까?
나는 다랑이보다도 더 부족하고, 더 초라한 주님의 고양이 같은데…. 자격으로 따지자면 주님 집 문턱에도 설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새인이요, 입으로만 믿음을 말하는 사두개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제가 드리는 말은 이래요.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제 사랑의 부스러기를 먹고 자랐나이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다랑이에게 늘 하는 말입니다.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 걱정할 일 없어. 그러니 그냥 행복하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살아줘.”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시요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나를 품에 안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다면, 내가 무엇을 더 걱정하고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제 기도는 단 하나뿐입니다.
“이 죄인은 주님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주목하여 주소서.”
새벽인데 다랑이가 “미야~” 하고 웁니다.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 가야겠습니다.
다랑이처럼 주님을 향해 웁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내가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인 까닭에 나는 그저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집 마룻바닥에 따뜻한 햇볕이 들 때 편안하게 몸을 웅크리고 잠들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단지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일 뿐이니까요.
뤼튼 버전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은 진실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에겐 더 확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집 고양이 ‘다랑이’는 이름 속에 ‘多(많을) + Love(사랑)’가 담겨 있습니다.
그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많이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과연 주님께서도 저를 다랑이처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실까?
저를 그렇게 측은하게 여기시고 품어 주실까?
하지만 저는 다랑이보다도 더 부족하고 형편없는 주님의 고양이 같습니다.
자격으로 따진다면, 주님의 집에 머물 자격 없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세인 같고, 입술로만 믿음을 외치는 사두개인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지금, 저는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제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나이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우리 다랑이를 사랑하며 늘 말합니다.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걱정할 일이 없어. 그러니 그냥 행복하고 건강하게 우리와 오래 살자!”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저를 품에 안아 자녀 삼아 주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죄인은 주님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를 주목하여 주소서!”
새벽, 다랑이가 “미야~” 하고 부릅니다.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 다가가듯, 저도 주님께 울부짖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겨자씨만 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그저 사랑받는 주님의 고양이이기에, 저는 주인님께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평안히 졸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단지 주님께서 사랑으로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deepseek 버전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이라.
그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더 분명하게 와닿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는 ‘다랑이’입니다.
‘다랑’은 ‘많을 다(多)’와 ‘사랑’이 합쳐진 이름이지요.
사랑스러운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자주 생각합니다.
주님도 나를 이렇게 바라보실까?
주님도 나를 이렇게 측은히 여기실까?
나는 다랑이보다 훨씬 부족하고 형편없는 주님의 고양이 같은데…
자격으로 따지자면 나는 주님의 집에 머물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바리새인이요, 입술로만 믿음을 외치는 사두개인일 뿐입니다.
지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제가 고백하오니, 주여 옳소이다마는 우리 다랑이도 저의 사랑을 먹나이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다랑이에게 말합니다.
“다랑아, 우리 집에서는 아무 걱정 없단다. 그냥 행복하게, 건강하게, 우리와 오래오래 살면 돼!”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품에 안으시고 자녀 삼아 주신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며 무엇을 염려하리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죄인을 주님의 고양이로 삼아 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주목하여 주소서!”
새벽입니다. 다랑이가 “미야~” 하고 웁니다.
사랑스러운 다랑이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다랑이처럼 주님을 향해 웁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지금껏 곁에 계시고 인도하신 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는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내가 그분의 사랑스러운 고양이이므로, 나는 그저 주인님께 “미야~” 하고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편안히 졸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다만, 주님이 기르시는 다랑이이기 때문입니다.
CLOVA X 버전
"주님은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분의 어린 양"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이 표현이 조금 멀게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더 친근한 확신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분의 고양이입니다."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은 다랑이예요.
'다랑'은 많을 다(多) + Love를 합친 말로,
사랑받기에 충분할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란 뜻이죠.
사랑받을 이유보다 더 큰 사랑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아이니까요.
그러다 문득 생각합니다.
주님도 나를 이처럼 바라보실까?
내 약함과 부족함마저 애틋하게 여기실까?
오히려 나는 다랑이보다 못한 것 같은데...
자격으로 보면 주님의 집에 머물 수 없는 이방인,
이기적이고 겉치레뿐인 바리새인, 입으로만 믿는 사두개인과 다를 바 없으니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의 옷깃을 붙들고 외치고 싶어요.
"여자가 말했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제가 말합니다. '주님,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 다랑이도 주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납니다!'"
하찮은 주인인 제가 다랑이에게 속삭입니다.
"네겐 아무 걱정거리 없어. 그냥 우리 곁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줘."
하물며 우주 만물의 주인께서 나를 품으시고 자녀 삼아주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제 기도는 단 하나입니다.
"이 죄인을 주님의 고양이로 받아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돌아보소서!"
새벽녘 다랑이가 "미야~" 하고 부릅니다.
사랑스러운 그 곁으로 다가갑니다.
다랑이처럼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다윗의 후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지금까지 함께하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좋은 주인, 나는 그의 고양이"
그분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면,
단지 "미야~" 하며 기대어 쉬면 됩니다.
따뜻한 햇살 아래 졸음이 쏟아질 때까지,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 그만이니까요.
왜냐하면 나는 그분이 기르시는 다랑이니까요.
'신앙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경의 제국들 (0) | 2026.02.16 |
|---|---|
| 급하신 여호와 (0) | 2026.02.03 |
| 400년 침묵의 의미 (0) | 2026.01.29 |
| 성경과 5대 제국 (0) | 2025.12.11 |
| 많은 영감을 주는.... (0) | 2025.10.26 |